동북아 정세와 서희의 리더십(6)
동북아 정세와 서희의 리더십(6)
  • 서울동북뉴스
  • 승인 2012.07.04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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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길 랑<비전경영전략컨설팅 대표>

▲ 명 길 랑비전경영전략컨설팅 대표
3.서희의 외교담판
  1)협상 전 상황
  거란이 침입했다는 소식을 접한 고려는 993년 10월 박양유 시중(侍中)을 상군사, 서희 내사시랑(內史侍郞)을 중군사, 최량 문하시랑(門下侍郞)을 하군사로 임명하여 거란군을 막게 하였다. 이때 전세가 고려에 불리하게 진행되는 가운데 거란이 고려의 봉산군까지 진출하였고, 서희는 군대를 동원하여 봉산군을 구원하러 출정하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서희는 소손녕과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소손녕은 다음과 같이 항복을 권유한다.

  "대조(거란)는 이미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였는데 지금 너희 나라 고려가 우리 강토를 점령하였기 때문에 토벌하러 온 것이다. 대조가 천하를 통일하였는데 아직까지 귀부 않는 나라는 기어코 소탕할 것이다. 지체하지 말고 항복하라”였다.

  서희는 소손녕에게서 이러한 침략이유를 듣고 난 후 전쟁이 아닌 협상의 가능성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소손녕은 다른 요구를 하지 않고, 고려가 항복하기만을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판단에 근거하여 서희는 서경으로 돌아와 소손녕에게 사신을 보내 협상하기를 성종에게 요청하였다.

  2)이몽전의 제1차협상
  성종은 서희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몽전을 거란 진영에 보내어 화친을 청하였다. 이몽전이 화친협상을 위해 거란 진영으로 가는 도중에 소손녕은 고려에 문서를 보내어 다음과 같이 요구하였다. "거란의 80만 군사가 도착하였다. 만일 강변까지 나와서 항복을 하지 않으면 섬멸할 것이니 군신들은 빨리 우리 군영 앞에 와서 항복하라”고 요구하였다. 

그 뒤에 이몽전은 거란의 병영에 도착하여 거란의 고려침략 이유를 듣게 된다. 소손녕은 "너의 나라가 백성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하늘을 대신해 벌주러 온 것이다. 만일 화친 하려거든 빨리 항복하라”였다.

이몽전이 아무런 성과없이 돌아오자 고려 조정은 거란의 요구에 대한 대응책을 강구하기 위해 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자리에서 관료들은 투항론과 할지론을 주장하였다. 투항론은 거란의 요구대로 항복하자는 것이고, 할지론은 서경 이북의 땅을 거란에게 주고 화의를 청하자는 것이었다. 성종은 두 주장을 들은 끝에 할지론을 택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그래서 서경의 창고를 열어 백성들이 마음대로 쌀을 가져가게 하고, 그래도 쌀이 남자 이 쌀을 거란군이 군량미로 사용할 것을 염려하여 대동강에 버리게 하였다.

이때 서희는 단호히 이러한 조치를 반대하였다. "식량이 넉넉하면 성을 가히 지킬 수 있고, 싸우면 반드시 이길 수 있습니다. 전쟁의 승패는 강약에 있는 것이 아니고, 적의 허약한 틈을 노려 용병하는데 달려 있습니다. 하물며 식량이라는 것은 백성의 생명입니다. 만약의 경우 적의 군량이 될지라도 헛되이 강물에 버려서는 안 됩니다. 또한 이렇게 하면 하느님의 뜻을 어기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하고 간청하였다. 성종은 서희의 말을 좋게 여겨 창고에 남은 곡식을 버리는 일을 중지시켰다.

서희는 또 한 가지 계책을 성종이게 아뢰었다. "거란의 동경으로부터 우리나라 안북부(안주)에 이르는 수 백리 사이를 모두 여진이 차지하고 있던 곳인데 선왕(광종)께서 이것을 취하여 가주·송성 등의 성을 쌓았습니다.

지금 거란이 침략한 의도는 이 두개의 성을 탈취하려는데에 불과 합니다. 그들이 고구려의 옛 땅을 찾겠다고 공헌하는 것은 실상은 우리를 협박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란의 병세(兵勢)만을 보고 경솔하게 서경 이북 땅을 떼어 주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삼각산 이북 또한 모두 고구려의 영토인데 그들이 한없는 욕심으로 끝없이 강요한다면 다 내어 주어야 하겠습니까? 하물며 국토를 떼어 적에게 준다는 것은 만세의 치욕입니다. 바라건데 임금께서는 수도(개성)로 돌아가시고 저희들로 하여금 적과 일전을 겨루게 한 뒤 그 때 가서 다시 화친을 논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주장하였다.

서희의 주장에 이어 전민관 이지백이 앞에 나서며 말하였다. "태조께서는 나라를 세우시고 임금들이 대를 이어 오늘에 이르렀는데 한번 싸워보지도 않고 갑자기 땅을 적국에 주려고 하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옛날 유비의 아들 후주가 촉나라를 다스릴 때 그의 신하 초주(焦周)가 후주에게 권하여 땅을 위나라에 바치도록하여 만고의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통촉하옵소서”하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생각해야할 것은 만약 서희의 주장이 소수의 의견으로 무시당했다면 거란에 서경 이북을 떼어주는 것으로 전쟁이 끝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전직 관민어사인‘이지백’이 서희의 의견에 동의를 표하고, 성종이 서희의 의견을 수용함으로써 국토를 떼어주는 일을 막을 수 있었다. 성종이 서희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은 서희의‘평소 말과 행동’으로 인하여 성종이 서희를 신뢰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3)안융진 전투의 승리
  고려에서 이러한 의견 조정을 가지는 동안 소손녕은 계속하여고려의 항복을 기다렸다. 그러나 이몽전이 돌아간 후 오랫동안 답변이 없자 소손녕은 안융진을 공격하였다. 고려는 대도수와 유방으로 하여금 싸우게 하여 거란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안융진 전투에서 고려가 승리했다는 것과 전투에서 패한 거란이 보복을 하는 대신 고려에 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요구했다는 점이다. 이를 분석해 보자.

첫째, 안융진 전투에서 고려 승리의 중요성이다. 만약 이 전투에서 패배했다면 투항론과 할지론이 더 힘을 얻었을 것이다. 고려가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서희가 3차 협상에서 논리를 전개하는데 큰 힘을 얻었을 것이다. 한 번이라도 승리를 거둔 상태에서 협상을 하는 것과 한 번도 승리하지 못한 상태에서 협상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동사강목>에서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 안정복은 이렇게 생각한다, 먼저 싸운 뒤에 화친을 요구하면 화친이 성립된다. 만약 그 기세만 보고 놀라 화친만 하려고 일삼는다면 적은 우리를 한없이 농락하고 능멸할 것이다. 만약 대도수의 승리와 서희의 굴복하지 않는 의기가 없었더라면 화친이 이루어지기는 커녕 적의 끝없는 요구를 채워 주느라 갖은 고난을 겪었을 것이니 이 일은 후세에 거울로 삼을만하다”라고 하였다.

둘째, 거란은 안융진에서 패배했음에도 보복을 하지 않고 고려에 대해 항복만을 요구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거란이 고려를 침략한 근본의도가‘전쟁을 통한 승리’또는‘전쟁을 통한 영토확장’이 아니라 고려의 항복, 즉 "거란에 대해 더 이상 적대적 태도를 취하지 못하게 하는 것”에 있음을 의미한다.

  4)장영의 제2차 협상
  고려는 비록 안융진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거란을 완전히 굴복시킬만한 힘은 없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여 성종은 장영을 협상대표로 파견해 화의교섭에 대한 거란측 의사를 타진하게 하였다. 장영이 거란진영에 당도하자 소손녕은 고려에 대하여 화의교섭 진행 대표자를 대신(大臣)으로 격상할 것을 요구하였다. "고려는 마땅히 조정의 대신을 우리 군전(軍前)에 보내어 나 소손녕과 면대하도록 해야 화의 진행이 가능할 것이다”고 말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거란이 화의협상 자체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만약 협상을 거부할 생각이었다면 협상상대를 거론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요구에 대하여 고려 조정에서는 거란에 파견할 대신의 인선 문제를 두고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부분의 중신들은 그 임무가 중차대하다는 것을 알고 회담 대표로 나서기를 꺼렸다. 이런 때에 중군사 서희가 대표로 가겠다고 자원하였다.

  라.서희의 제3차 협상
  1)의전
  서희는 소손녕의 군영에 이르러 국서를 제시하고 통역을 통해 회견의 예를 물었다. 소손녕이 말하기를“나는 대국의 귀인이니 고려 사신은 마땅히 뜰에서 절을 해야한다”고 주문했다.

이에 대해 서희는 "신하가 임금에게 절할 때에 아래에서 하는 것은 예이거니와 지금 양국의 대신이 서로 만나는 자리에서 그러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하고 응수했다. 서로 이러기를 두세번 되풀이 했으니 소손녕이 받아들이지 않자 서희는 숙소로 돌아가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소손녕은 마음 속으로 존경의 마음이 생겨 당에 올라 예를 청할 것에 동의하니 이에 서희는 영문(營門)까지 말을 타고와 이곳에 이르러서야 말에서 내린 후 뜰에 들어와 소손녕과 대등한 예를 하고 동서로 마주 앉아 담판에 들어갔다. 회담개시전 의전 다툼은 때로는 기싸움으로 회담의 내용과 결과에 까지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단순한 형식문제가 아님을 서희는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서희가 임하는 의전상의 태도는 회담 대표로서의 모범적 사례로 볼 수 있다.

서희와 소손녕과의 회담은 전시에 개최된 강화 회담으로써 분위기도 무겁고, 국가의 안위가 걸린 중차대한 담판이다. 서희는 적진의 군영 속에서 동아시아 대국의 백전노장인 소손녕을 맞아 회담하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첫번째 관문인 의전에서 당황하거나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상대의 기선을 제압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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